옹기
지 못해 구워 온 옹기, 아들은 좋아서 한다는군
[160년 옹기家 황충길 父子]
'옹기 굽는 상놈' 싫어 그만두려고 악착같이 구워 딴일할 돈 모았죠
그런데 꼭 벌 받듯이 가족이 아파… 마음 잡으니 名匠 호칭에 富까지
난 눈어림으로, 아들은 저울로 작업… 신기하게도 만들고 나면 거의 같아
지난달 23일에 문을 연 서울 상암동 중소기업역사관에는 옹기 다섯 점이 전시돼 있다. 김칫독 하나와 그릇 네 개다. 개관식 날 이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는 이 옹기를 만든 명장 백(생몰 미상)이 옹기를 만든 이래 164년이 되었다. 전통예산옹기는 충남 예산 오가면 점촌마을에 있다.
황춘백은 천주교도였다. 19세도들기도했다. 지금도 전국에 40여 군데 있는 옹기회사 사람들은 90%가 천주교도다. 故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도 옹기장이였다. 그가 만든 장학회 이름은 옹기장학회다. 옛 옹기들을 보면 매화꽃, 난초, 붓 흔적으로 숨겨놓은 십자가 무늬를 찾을 수 있다. 황충길도 "나는 태중(胎中)부터 천주교도"라고 했다.
명장 황충길이 아들 황진영에게 가르침을 준다. 유약 바르지 않은 커다란 옹기들이 가르침을 함께 듣는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태중부터 옹기장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만 하면라도 더 팔아야 돈 벌어서 이거 관둘 수 있으니까."
그런데 돈이 좀 벌리면 꼭 누군가가 아팠다. 어머니가 아프더니 그다음에는 찾을 자금 벌어놓으면 몽땅 병원비로 흘러갔다. 황충길은 "딴생각한 죄로 하늘이 내린 벌"이라 결론 내렸다.
옹기는 흙으로 만든 그릇에 솔가루와 콩깍지 잿물로 만든 유약을 발라 1300도 고온으로 한 번 구워 만든다. 미세한 구멍은 공기 분자보다 크고 물 분자보다 작다. 김치 같은 발효 식품을 저장하는 용기로는 딱이다. 중국산 상품이 온갖 곳에서 주름잡지만, 옹기 시장만은 맥을 못 쓴다. 황진영(42)은 "발효 식품 문화에 맞춰 진화해온 옹기의 '숨구멍'이 중국 옹기에는 없다"고 했다. 황진영은 황충길의 아들이다.
1996년 황충길이 만든 냉장고용 김치 항아리가 제1회 농민예 부문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1998년에는 공예 명장에 선정됐다. 옹기 부문으로는 처음이다. '명장'이 된 랍니다." 1997년이다. 황충길이 말했다. "애들만은 여기를 탈출시키려고 초등학교 때부터 대전으로 쫓아냈다. 그런데 진영이는응하지 못하고 1년 만에 돌아왔다."
운명은 그런 것이다. 군대를 갓 제대한 진영은 이 선언과 함께 혜전대학 도예과에 입학해 '과학적'으로 옹기를 공부했다. 그리고 아버지 회사에 일하던 한양여대 도예과 학생 강현숙과 결혼했다. 지금 이 옹기장이 부부는 "아버지의 느낌과 손맛을 과학적인 데이터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이 싸운다버지의 눈어림이 틀려 보였고 아비에겐 저울과 자와 카메라로 일일이 계량을 하고서야 흙을 개는 아들이 답답했다. 그런 보니 아버지의 눈어림과 아들의 과학적인 분석이 거의 동일한 게 아닌가. 아들이 말했다. "선대부터 아버지까지 축적해놓은 경험치가 바로 과학이었다. 나는 그걸 객관화해서 더 쉽게 만들 방법을 찾는 거고."
4대로 이어진 예산옹기가 한 해 매출이 10억원이 넘는다. 더 이상 몰른들은 먹고살려고 시작했지만 나는 일이 좋아서 한다. 내 아들도 잇게 하고 싶다." 누가 아는가. 할아버지가 만든 옹기를 바라보던 그 아이가 또 흙을 만지고 가마에 불을 지피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