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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절' 선암사와 개심사에서 위로받다 

살아가야 하기에 아픈 이 4월에 꽃은 곁에 피어 忍苦를 들려준다
仙巖寺는 영산자 보랏빛 물들고 開心寺엔 연둣빛 진귀한 청벚과 마음에 난 모 깎는 승방 있구나
고달픔 달래주는 供養의 꽃인가

봄이 봄 같지 않다. 하늘이 우중충하게 낮다. 맑을 거라던 날에도 안개인지 연무인지 뿌옇기 일쑤다. 기온이 높고 대기가 오래 머무는 데다 비까지 드물어서라고 한다. 봄꽃도 작년보다 이르게는 보름 일찍 피었다. 한꺼번에 우르르 왔다 우르르 떠났다. 4월에 벌써 아득한 늦봄 냄새가 난다.

지난 주말 잔뜩 찌푸린 하늘보다 가슴이 더 답답했다. 아기 손처럼 여린 연둣빛 새잎들을 보고 싶었다. 순천 선암사를 떠올렸다. 이 1500년 백제(百濟) 절로 들어서는 숲길엔 유난히 많다. 지절대는 계곡을 왼쪽에 두고 순한 흙길을 걷는다. 키 큰 활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차 연록부터 진초록까지 갖은 녹색으로 병풍을 쳤다. 아무리 날이 흐려도 생명의 합창은 찬란하다. 눈이 시원하고 숨통이 터진다.

대웅전 마당으로 드는 만세루에 큼직한 편액 '육조고사(六朝古寺호란 때 지키던 강화성(城)이 떨어지자 남문에서 스물셋에 자진(自盡)했다. 여느 4월 같으면 초파일 행사를 예고했을 편액 아래 플래카드가 방문객에게 말을 건넨다. '모두 한마음으로 슬픔과 고통을 나눕시다.'

대웅전 옆 공양미 담아둔 학독에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날아왔다. 카메라를 겨눴더니 쌀 쪼아 먹으려다 말고 눈치를 본다. 꽁무니 돌려 달아날 채비부터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지 머뭇거린다. 왼쪽 돌계단을 올라서자 눈이 환해진다. 대웅전 뒤 키 3m나 되는 나무가 온통 진보라 꽃이다. 진달래 진 지가 언젠데 한다. 그 옆 400살 흰철쭉은 나이가 무색한 순백 꽃이 아이 손바닥만 하다.

무우전 돌담길로 올라선다. 거기 줄지어 선 늙은 매화 여남은 그루가 진작에 꽃 떨구고 새 잎 무성하다. 돌담길 초입 원통전 옆마당에도 영산자 두 그넘고 화사한 꽃들이 사방으로 뻗어 둥근 꽃 봉분 같다. 곁에 늘어선 겹벚도 소담스러운 진분홍 꽃이 흐드러졌다. 때아닌 꽃멀미가 난다. 원통전 뒤 칠전선원 앞엔 630살 선암매(梅)가 8m 거목으로 버티고 섰다. 회춘하듯 싱그러운 연두 잎으로

선암사는 '꽃 절'이다. 늦은 3월이나 이른 4월 매화로 시작해 5월까지 산수유 동백 벚꽃 영산자 영산홍 복사꽃이 피고 지며 꽃대궐을 이룬다. 여름에도 자줏빛 배롱꽃, 노란 모감주꽃, 하얀 치자꽃, 빨간 석류꽃이 이어지는 전통 조경의 보고(寶庫)다.

불가(佛家)에서 꽃은 고행의 세월을 견뎌 피기에 온갖 수행, 만행(萬行)을 상징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보살행(行)의 서원(誓願)이다. 그래서 초·향·차· 과일·쌀과 함께 부처에게 바치는 육법(六法) 공양에 든다. 선암사의 봄은 부처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꽃 공양으로 넘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산 상왕산 중턱 백제 고찰(古刹) 개심사에 들렀다. 아담한 절집을 꽃이 휘감은 또 하나 '꽃 절'이다. '洗心洞(세심동)' '開心寺(개심사)'라고 새긴 자연석 둘이 산문을 한다. 마음을 씻는 골짜기, 마음을 여는 절. 절묘한 대구(對句)다. 솔숲 지나 절에 다다르면 네모난 연못 경지(鏡池)가 객을 맞는다. 외나무다리 건너며 못 물을 거울삼아 마음 가다듬으라 이른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석축 위 범종각은 네 기둥이 휜 나무 그대로 지붕을 떠받쳤다. 춤추듯 굽은 기둥이 범종을 너그럽게 감싸 안았다. 축대 모퉁이엔 겹벚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먹만 한 하얀 꽃떨기를 늘어뜨렸다. 진분에 왔더니 그 사이 죽은 모양이다.

 

대웅전 왼쪽 승방 심검당도 범종각처럼 굽은 나무를 썼다. 기둥과 들보와 문턱이 단청 한 점 없이 말간 얼굴로 물결친다. 자연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한 집이다. 여염집 새하얀 겹벚꽃이 어우러졌다. 숲 속에 숨듯 들어선 해우소는 진짜 측간이다. '용무 본 뒤 곁에 쌓아둔 낙엽을 뿌려달라'고 쓰여 있다. 문짝도 없이 트인 변소 칸에 쭈그리고 앉아 앞뜰에 활짝 핀 분홍 겹벚꽃을 본다.

대웅전 오른쪽 명부전 마당 끝에도 겹벚 네댓 그루가 있다. 꽃 빛깔이 이상하다. 신비롭게도 푸르스름한 연둣던 진객(珍客)이 올봄엔 서둘러 왔다. 그 아래 서서 서늘한 기운을 쏘인다. 개심고 푸른 겹꽃들이 봄마다 마지막 벚꽃 잔치를 벌인다.

어느 시인이 화창한 봄날 한숨지었다. '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봄은 축멸이다. 살아 있다는 기쁨과 살아가야 한다는 아픔이 엇갈린다. 온 나라를 어둠에 가둔 이 4월이 잔인하다. 청신한 새잎과 아름다운 공양화(花)에 묻힌 두 절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 2014/04/24          -조선일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순천 조계산 선암사(2013.06)

​서산 상왕산 개심사(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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