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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태우는 데 한나절, 세우는 데는 천년도 부족"

61년 만에 무공훈장 받은 故 차일혁 경무관

 

 

 1953년 총경으로 승진한 뒤 경찰 정복을 입은 차일혁 경무관.

지난달 25일 국방부는 고(故) 차일혁 경무관의 유족에게 화랑 무공훈장 2개를 전달했다. 1952년 차 경무관의 빨치산 토벌 전과를 61년 만에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전시라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훈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차 경무관은 이번에 종군기장 1개도 추가로 받았다. ‘전쟁영웅에 군과 경찰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는 방침에 따라 국방부 확인 작업에 나선 것이다.

차 경무관은 이미 충무 무공훈장 1개, 화랑 무공훈장 3개, 대통령수장 1개, 종군기장 1개, 공비토벌기장 2개를 받은 역전의 용사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서 무명(武名)을 떨쳐 ‘지리
그동안 경찰 내부에서도 그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던 경찰도 뒤늦게 차 경무관을 조명하고 있다. 2011년 6월 그를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1계급 특별승진시켰다. 충남 아산 경찰교육원의 대강당은 그의 이름을 따 ‘차일혁 홀’로 불린다. 경찰 창설 과정에서 친일경찰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논란을 재우려면 항일투사 출신인 그를 띄워야 하기 때문이다. 차 경무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악질 日警 사이가와 쓰보이 암살설
그는 1920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민족성향 교사를 연행하던 일제 특별고등계 형사를 폭행해 다니던 홍성공업전수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36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지강(芝江) 김성수 선생과 만났다. 지강 선생은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 단원이었다. 차 경무관의 평생 멘토였다.
 중국군 포병장교로 복무했다. 41년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대부분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중국이나 북한을 선택했지만 그는 남한에 남았다. 차 경무관의 아들 차길진(66)씨는 “아버지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미 군정 당국은 새로 만든 한국 경찰이 자리를 잡기까지 일본인 경찰들을 계속 기용했다. 좌익 시인인 임화를 고문해 악명이 높은 일본 경찰 사이가 시치로(齊賀七郞)는 부정하게 번 재산을 빼돌리면서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그가 45년 11월 2일 자택 앞에서 권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신문에선 ‘누군가가 사이가를 처단했다’고 보도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사이가를 저격했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최근 학계 연구에 따르면 차 경무관은 지강 선생, 이규창 등과 함께 사이가 저격에 가담했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차 경무관으로 전해진다. 광복 후 아나키스트 운동을 했던 이문창씨도 “‘차 동지가 사이가를 쐈다’는 말을 선배들에게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다른 일본 경찰 쓰보이 이와마쓰(坪井巖松)도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다.

차 경무관은 6ㆍ25전쟁이 난 뒤 인민군 치하에서 장정들을 모아 해 싸웠다. 수복 후 경찰에 투신해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경감)을 맡게 됐다. 51년 1월 결사대 105명을 이끌고 당시 남한의 유일 수력발전소인 전북 정읍 칠보발전소를 점령했던 빨치산 2000여 명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 차 경무관의 보신술을 배워 박격포를 잘 쐈다. 수십m 앞 담배개비를 총탄으로 부러뜨릴 만큼 소총도 명사수였다”고 전했다.

그는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단순 부역자는 풀어줬다.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은 빨치산은 전쟁포로로 대했다. 부대원들에게 일체의 보복살인을 금지시켰다. 김 회장은 “대장은 ‘적 포로에 관대한 부대는 실전에 강하다’고 늘 강조했다”고 말했다. 차 경무관은 친필일기인 『진중기록』에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라고 썼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실제 모델 

53년 7월 휴전이 됐지만 빨치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당시 남한 각지의 빨치산은 ‘남부군’으로 통합됐다. 남로당 출신 이현상이 남부군 사령관을 맡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차 경무관은 그해 9월 17일 그를 찾아내 사살했다. 그러곤 친척이나 친구들도 인수를 거부한 이현상의 시신을 거둬 화장한 뒤 골분을 섬진강에 뿌렸다. 이현상 사살의 공적을 놓고 다퉜던 군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못마땅한 분위기가 높았다. 그렇지만 “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인가”라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51년 5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ㆍ암자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상부로부터 내려왔다. 차 경무관은 전남 구례의 화엄사 대웅전 문짝을 떼어낸 뒤 소각했다. 그러고는 “문짝만 태워도 빨치산 은신처를 없앨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절을 태우는 데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고찰을 구한 공로를 나중에 인정해 2008년 10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여

차 경무관은 53년 영화 ‘애정산맥’의 실제 주인공이 된다. 이 영화에선 죽마고우였던 전투경찰과 빨치산이 같은 마을 출신 여성을 두고 삼각관계에 놓였다. 남자 주인공은 그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후에 인기 TV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후문이다.

차 경무관은 58년 금강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차길진씨는 “아버지를 비롯한 전쟁영웅들은 살아서 애국했듯이 죽어서도 애국하는 마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줬다. 그들의 영혼은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고(故) 차일혁 경무관은
1920년 전북 김제 출생
36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37년 중국중앙군관학교 입학
41년 조선의용대 입대
45년 귀국 후 일본 경찰 사이가 저격
50년 경찰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 임명
51년 칠보발전소 탈환. 화엄사를 소각 위기에서 구해
53년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사살. 총경 승진
54년 충주경찰서장
56년 진해경찰서장. 충남경찰국 경비과장
57년 공주경찰서장
58년 수영 중 심장마비로 사망
2011년 경무관으로 특별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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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유병숙 월간 '한국산문' 편집위원

 

병원서 치매 진단 받은 시어머니 급기야 음식 만드는 방법도 잊어
살뜰히 돌보던 아버님 돌아가실 때 어머니는 갑자 어머니 여생 곱게 해

"당신, 점심은 드셨어요?"

두 분이 마주앉아 방금 드셨으면서 그새 잊으셨나 보다. 시어머니는 도돌이표처럼 말씀을 반복하신다. 답답해진 내가 "어머니, 좀 전에도 아버님께 여쭤 보셨잖아요"라고 니는 갑자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가 바보라서 그래. 바보가 다 됐어"라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여간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던 분이었다. 당황한 내가 아무리 달래도 도통 그치지 않으셨다. 나야말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켜보시던 시아버님이 나를 부르셨다. 아버님은 내 눈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네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다. 그냥 건망증이 심하게 왔을 뿐이야. 그렇게 알거라." 이 무슨 말씀이신가? 종합병원에서 치매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고, 또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장기요양 3등급'이라는 판정 통지 지켜주고 싶어하는 한 지아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자신도 노후질환으로 불편한 몸이실망정 아버님은 어머니의 가장 힘 있는 보호자셨던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음식이 식탁에 올라왔다. 조리법과 상관없이 갖은 양념을 마구 넣어 섞으셨다. 음식 고유의 맛이 사라지고 이도 저도 아닌 니는 음식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리신 것이었다. 그래도 일절 내색하지 않고 잘 드시는 아버님의 인내심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앞에서 가족 누구도 감히 음식 타박을 할 수 없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유난히 의가 좋으셨던 두 분은 늘 손을 잡고 다니셨다. 아담한 키에 중절모를 쓰신 아버님이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면 썩 보기 좋은 황혼의 그림이 그려지곤 했다. 두 분이 외출하신다고 해서 옷 입는 것을 도와드릴 겸 살짝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외투 단추를 잘못 끼워 삐뚜름하게 옷을 입고 서 왔다. 부부가 다정한 친구처럼 늙어가는 모습은 내가 닮고 싶은 것이었다. 머지않아 닥쳐올 내 모습이 오버랩되.

그런 아버님께서 자리에 누우시게 되자 어머니는 그림자처럼 늘 곁에 계셨다. 아버님은 당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계신 어머니와 소곤소곤 얘기를 나다. 어머니가 빨리 털고 일어나시라 채근하면 아버님은 "으쌰!" 하는 기합과 함께 일어나는 시늉으로 맞장구를 치며 찡긋 윙크까지 날리곤 하셨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님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셨고, 혼수상태에 빠지자 어머니께서 흐느끼셨다. "같이 간다고 하더니 혼자만 가우? 나도 데리고 같이 가요." 하지만 이미 저승의 문턱에 한 발치신 아버님께선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아버님이 임종하시기 직전에 어머니는 갑자기 "여보, 사랑해요. 정말 고마웠어요. 마음 편히 가시구려" 하시는 게 아닌가! 순간 아버님의 눈가에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고는 평온하게 숨을 거다. 아버님은 생(生)의 마지막 끈을 놓으시기 전에 어머니의 음성을 알아들으신 것이었다.

그 며칠 전 아버님께서 내 남편을 찾으셨다. 반백(半白)의 아들을 보고 잠시 머더니 "그동안 고마웠다. 미안하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네 어머니를…." 차마 말씀을 맺지 못하셨다. 대답 대신 아버지와 마주 잡은 남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후 어머니의 상태도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어머니께선 걸핏하면 "아버지는 어디 갔수?" 하며 식구들을 놀라게 하셨다. "멀리 여행이라도 갔나?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언니, 별일 없겠지요?" 급기야 며느리인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하셨다. 자주 아버님 근황을 물으시는 어머니가 애처로워 마음이 아팠다. 치매는 어쩌면 극도의 슬픔을 지우는 지우개인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으셔요?" 하고 여쭈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시며 살짝 마음을 감추셨다. "참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는데." 아련한 눈길에 그리움이 절절했다

아침에 목욕을 시켜 드리고 어머니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 드렸더니 싱긋 웃으시며 "어휴, 좋은 냄새! 언니, 나 시집 보내려우?" 하시며 한껏 달뜨신다. "멋진 할아버지를 구해 드려요?" 짓궂은 내 물음에 "싫어. 혹시 내 신랑이라면 모를까." "신랑이 누구예요?" 어머니께서는 얼른 아버님 함자를 대시며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하신다. 귀여우신 우리 어머니! 수줍어 홍안(紅顔)이 되신 구십 노파의 눈동자에 생전의 아득 고여 계신다. 노환(老患)의 아내를 그토록 살뜰히 아껴주신 아버님이 계셨기에 어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이처럼 고운 정서를 안고 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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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문화재 제228호
태백산 천제단(太白山 天祭壇)

매년 10월 3일 하늘을 열어 나라를 세운 날을 리는 개천대제(開天大祭)를 열다.


逸聖尼師今 五年十月 北巡親祀太白山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원형 제단 천왕단(天王壇)은 하늘이요 각형의 하단(下檀)은 땅이며

삼각형인 장군단(將軍檀)은 사람이니 민족의 산, 태백산에 천지인(天地人)을 담다.
제단으로서 신라 시대부터 현재까지
그 제례의식이 전승되고 있는데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김선풍 (중앙대 민속학과 명예교수)

태백산 천제단(太白山 天祭壇)

반만년 홍익인간의 맥을 이어가는 민족의 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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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연-[윤세영의 뜻한 동행]

 

 

짧은 봄날의 꿈처럼 아주 잠깐 일본에 다녀왔다. 3월 초 일 일본행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된 인연같이 느껴져서다.

나고야에서 내가 만난 사람은 이미 13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일본인이었다. 공연장 무대에는 그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생전 모습이 동영상으로 비치고 있었다. 지적이고 예민한 인상의 일본인이 재일 한국교포들과 어울려 꽹과리를 치며 신명나게 어깨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는 주쿄(中京)대의 이나가키 마사토(稻垣眞人) 교수라고 했다.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인연은 장사익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2000년 2월에 재일교포 채효(蔡孝) 씨와 함께 우리 전통가락을 공부하는 ‘놀이판’을 이끌어 온 이나가키 교수가 위암으로 사경을 헤매자 놀이판 회원들은 장사익 선생 초청공연을 주선했다. 평소 그의 소원이 나고야에서 장사익 콘서트를 여는 것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공연 날, 병이 깊은 그는 리허설이라도 보고 싶어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리허설이 다 끝난 뒤에야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공연장에 도착했다. 그 모습을 본 장사익 선생은 방금 끝낸 리허설을 다시 시작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공연이었다.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그는 아픈 것도 잊고 리허설은 물론 본 공연까지 다 관람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닷새 후 세상을 떴다.

그런 사연이 있어 장사익 선생은 13년 만에 다시 그를 찾아갔고, 나는 장사익 생과의 인연으로 추모공연에 가게 되었다. 나고야에 머문 3일 동안, 그리고 서울에 돌아와서도 내내 사람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고야까지 달려가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 분을 만나고 왔다는 것은 분명 알지 못할 힘의 작용이다. 간절히 원하는 그 한 사람을 위해서 공연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 먼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해마다 추모공연을 벌이

그날, 놀이판 사람들이 일본식의 한국어 발음으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를 부르고 비나리와 판소리와 사물놀이를 연주할 때, 일본 땅에서 듣는 우리 가락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들은 또 무슨 인연으로 나고야에 뿌리를 내려 타국에서 시리고 서러운 세월을 보내게 된 걸까

죽어서도 산다는 말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죽었다고 해도 세상과 영영 이별한 게 아니다. 인생이 비록 일장춘몽일지언정 인연의 끈은 이리도 질기고 신비롭기만 하다. 하물며 가까운 인연으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새삼스럽게 귀하고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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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펑요우(老朋友)

 

1969년 중·소(中·蘇) 국경 우수리 강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닉슨 대통령이 키신저 안보보좌관에게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키신저가 말했다. "2차대전 때 많은 나라가 히틀러의 보복이 두려워 유대인 입국을 거부할 때 중국은 우리 유대인을 받아줬습니다." 소련이 중국에 대한 핵복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키신저는 "중국이 공격받는다면 보고만 있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소련은 핵 카드를 내려놓았오펑요우)'라고 부른다. 그가 중국에 올 때마다 융숭하게 대접한다.

 

 

 

▶지난해 중국에 머물던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이 숨졌을 때도언론은 "라오펑요우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당시 신화통신이 시아누크를 비롯해 '영향력이 컸던 라오펑요우 10명'을 꼽았다. 키신저, 아라파트, 사마란치, 무바라크, 시라크, 리콴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중국의 붉은 별'을 쓴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도 포함됐다.

▶'라오펑요우'는 긴 시간 속에 신뢰와 우정으로 다진 친구 관계를 이른다. "옛 친구는 금(金), 새 친구는 은(銀)"이라는 말도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그제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박 대통령을 "중국 국민과 나의 라오펑요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 주석은 2005년 저장성(浙江省) 당서기 시절 한국을 찾아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을 만났다. 부산에 있던 박 대표는 일정을 바꿔 시 서기를 63빌딩 식당으로 초대했다. 두 사람은 새마을운동과 북핵 문제에 관해 두 시간이나 대화했다. 시 서기가 "새마을운동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자 박 대표는 책 두 상자를 부쳐줬다.

▶중국 국영 인민출판사는 박 대통령 전기 '절망이 희망을 창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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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에게 고마움을 전한 세한도

 

 

 

세한도(歲寒圖, 국보 화이다.

긴 화면에 단지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과 그 좌우에 소나무· 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을 뿐, 여백의 텅 빈 화면을 보노라면 한 겨울 추위가

매섭게 전해져 뼛속까지 시리다. 화면 오른쪽에는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란 관지(款識)에

정희(正喜)·완당(阮堂)이라고 새긴 낙관이 찍혀 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용 비늘이 덮인 노송과 가지만이 앙상한

늙은 잣나무를 통해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가 담백하고도

고담(古淡)한 필선과 먹빛으로 한지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한도는 지극히 절 정신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병제(竝題)에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듯이 황량한 세상에 지조 높은 선비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귀양살이하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제

문인화의 인위적인 기교를 훌훌 털어 버려

선비의 맑은 문기(文氣)가 넘쳐흐른다.

 

아 아, 세상에 날 찾는 이 없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며 서화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추사(秋史)이다. 증조부되는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영조의 첫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해 열 셋에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부마(駙馬)가 된 월성위는 예산 오석산 근처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에 집을 짓고고택(秋史古宅)'이 바로 그 집이다.

김정희는 증조 할머니가 옹주였으니 집안의 범절이나 내력이야

더 할 나위 없는 명문가의 자손이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어서는 청나라를 왕래하며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등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금석문(金石文)의 감식법과 서법(書法)을 익혔다.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완당(阮堂)'은 당시 옹방강에게서 '해동 제일의

문장'이란 칭찬과 함께 지어 받은 것이다.

또 금석 자료를 찾고

 

1819년,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예조 참의,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면서 순탄한 벼슬길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부친이 비인 현감(현재 충남 서 지내면서 김우영을

파직시켰는데, 그 일로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김정희는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갔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자,

1840년 제주도 정포(靜浦)에 또다시 유배, 안치되었다.

아버지인 김노경은 그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김정희는 영의정이며 친구였던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은 모면했으나

제주도 서쪽 백 리 거리의 외딴 집에서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만 정진해서

마침내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어냈다.

 

이처럼 절대 고독과 맞대면해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정희에게

마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일까? 거센 바파도가 돛단배를

집어 삼킬 듯한 험난한 뱃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주도를 찾아와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와

역관(譯官) 이상적이었다.

 

세한도를 낳게 한 이상적은 김정로 만학(晩學)과

대운(大雲)이란 책을 중국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 주었다.

그 당시의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내 준다는 것은 여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여 두 번이나 책을 보내 주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냉랭한 세태에서 선비다운 지조와

의리를 훌륭히 지켜내었다. 김정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세한도를 그려 인편을 통해 보내 주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이 그림은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송백(松栢)에 비유해 칭찬하고, 이어서 마음을 담은 발문(跋文)을

특유의 추사체(秋史體)로 써 그림 끝에 붙였다.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책을 보내주더니,

금년에 또 우경(藕耕)과 문편(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 책은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닌데 천만 리 먼 곳에서 여러 해를 거쳐

사서 나에게 얻어 보게 했으니 한때의 일이 아니다.

세상인심은 도도(滔滔)하여음을 두지 않고

이내 바다를 건너 초췌하고 여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세상에서 권세와 이익을 좇는 것을 일컬어 태사공[司馬遷]은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을 함께 갖은 사람이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제가 소원해진다'하였다.

 

그대도 역시 도도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인데,

스스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 밖으로 빠져나와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으니,(그렇다면)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날씨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송백이 사계절이 없이 시들지 않고

날씨가 차가워지기 전에도 송백이요,

 차가워 진 후에도 송백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특히 날씨가 차가워진 후를 칭송하였다.

그대가 나와 함께 있을 적에 그대를 위해 잘해 준 것도 없고,

뒤(유배시)에도 덜 생각해 준 

그런 연유로 전(권세가 있을 때)에 그대를 칭찬한 적이 없는데,

그대는 훗날 성인의 칭찬을 받으려 한 것인가.

성인이 특히 칭송하기를 시들지 않는 정조것이다.

오호라, 한나라 서경[洛陽]에 순박하고 후덕한 인심이 있었을 적엔

급암(汲 )과 정당시(鄭當時)같은 어진 사람도 그 빈객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으며, 하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문(榜文)을 붙인 일은

세상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한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김정희는 헌종 말년(1848)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친구인 권인돈(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66세 노인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후로는 안동 김씨의 계속된 세도

김정희는 부친의 묘가 있던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더욱 몰두하더니 71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현재 그의 묘는 추사 고택 왼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묘 앞쪽에는 밑동에서 세 줄기가 올라와 비스듬

청아하게 일깨우는 듯하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그 후 북경으로 가 그곳의 학자들에게

두루 이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장악진(章岳鎭)·조진조(趙振祚)등

16명의 명사들은 앞을 다한 감상문) 등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두루마리 형태로 완성되었다.

 

국보를 찾아왔노라  

 

이상적이 소장해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가

어떻게 그 후 일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고졸한 문향을 뽐내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의 손에 세한도가 들어 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도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살았다.

그리고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 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

「淸朝文化東傳의 硏究(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원제: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거세지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의 끊질 긴 노력에 의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겼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그 사람이다.

세한도가 후지즈카의 수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재형은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아니라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그림을

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 수장가요,

대 감식가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골동사에 굵은 필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 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 미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에 소재한 멋들어진 한옥 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던 풍류객이었다.

재기가 발랄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손재형은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해 서화뿐만 아니라 전각과 유품까지

열성적으로 수집하였다.

 

일제 때,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만은 눈여겨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겸재(謙齋)의 화첩까지 양가 댁의 불쏘시개로 쓰이기 예사였고,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대가의 그림도 벽지로 둔갑한 채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어 버렸다. 어두웠던 시절,

조상의 예술혼과 기상이 신광을 찌르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자긍심을 부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손재형의 집념은

민족문화재수호의 귀감이기도 하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찾아 동경으로 달려갔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어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死地)였다.

손재형은 물어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내고는,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이만 저만이

아님을 잘 아는 손재형인지라

장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배짱 하나로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즈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말이말하지 않았다.

매일 눈만 뜨면 찾아가 인사를 하기를 일주일, 수상히 여긴

후지즈카가 드디어 목적을 물었다.

"어쩐 일로 매일 찾아오는 거요?"

기회를 엿보던 손재형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무겁게 털어놓았다.

얼굴에는 비장한 의지가 감돌았다.

"세한도를 양보해 주십건이요.

당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오. 당장 나가시오."

노기가 가득 찬 얼굴로 후지즈카가 일어나 앉았다.

눈빛에는 추호의 양도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재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손재형은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그 집을 나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스럽게 들리고 거리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손재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지독한 상황까지도 각오한 그였다. 당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찾아가 세한도를 양도해 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백 여일 가까이,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손재형의 열성에 후지즈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하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을 하겠소."

긴장한 손재형을 후지즈카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거든 그림을 당신에게 보내 주라고 하리라.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 주시오."

드디어 희망의 빛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동경의 전세는 날이 다르게 험악해져 갔다.

그 와중에 세한도가 온전히 살아 남을 지 의심스러웠다.

한번 물러서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이 몰려왔다.

"후지즈카 상, 기왕에 넘겨주시기로 결심했다면 당장 넘겨주시지요."

그러자 후지즈카는 단호하고도 매정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림없는 말,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물러가시오."

손재형은 다시 후지즈카의 집을 물러 나왔다.

그는 마지막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 생각하고, 10여 일을 계속해서 찾아갔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굳

 

김정희의 혼이 배인 명품이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손재형이 얼마의 돈을 주고 후지즈카에게서 세한도를 입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만약에 그때 세한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랑스런 국보 한 점을 영원히 잃을 뻔하였다.

후지즈카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재형은 그 즉시 오세창에게로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오세창은 즉석에서 배관기를 써 주었다.

"전화(戰禍)를 무릅쓰고 사지(死地)에 들어 가 우리의 국보를 찾아 왔노라."

 

바람처럼 옮아간 세한도

그러나,

세상 물건에는 모두가 때에 따라 주인이 있는 법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 끝에 되 찾아온 세한도도 그 후

너무나 어이 을 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손재형은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조직해

초대 회장이 되더니, 1947년에는 진도 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 대 후반부터는 정치에 투신해 일약 정치가로 활약했다.

 

1958년 민의원 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 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화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케 할 만큼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하나 둘씩 저당 잡히며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이다.

개성 사람, 이근태(李根泰). 그는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개성 상인으로

가회동에서 살았다. 하루는 손재형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세한도를 비롯한 고서화가 한 뭉치나 들려 있었다.

 

이근태는 군선도(群仙圖),

겸재(謙齋)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등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들이다.

 

그런데 손재형은 첫 달부터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집착했던 그에게 권력은 그토록 달콤했던가?

이근태는 몇 달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꾸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붙기 식이었다. 몇 번이고 손재형을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으나 워낙 바쁜 의원님이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다

남의 이자 돈을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살던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의 작품은 거장들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하지만 그 그림들 역시 남의 이자 돈을 막는

볼모로 모두 팔려 나갔다. 그러나 정작 손재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세한도는 결국 개성 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수장하고 있다.

이상적에 이어 후지즈카를 거쳐 손재형, 손세기로 바람처럼 옮아 다닌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일,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국보 제 180호로 지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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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글·사람 빌리지마라"… 이 집안의 자존심        

       

  -[사람을 기르는 집] - 청록파 시인 조지훈 집안


당대 명문의 수필 '지조론' 쓰고 독재와 싸운 제자 위해 헌시 바쳐
책장순서 알만큼 기억어리광 없이 자란 3남 1녀
"고상한 정신, 듬뿍 물려척(尺) 장신이었다. 가르마 없이 뒤로 쓸어 넘긴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느린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 시선은 언제나 먼 하늘에 두고 걸었다. 소매 끝을 슬쩍 걷어 올린 줄무늬 셔츠에 베레모를 쓰고 성북동 산길을 산책할 때면 대인 흘렀다. 자녀들은 "외모뿐 아니라 내면의 멋도 범인(凡人)이 흉내내기 어려운 깊이와 품격을 갖춘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조지훈은 시인이자 논객이었고 지사였다. 당대 명문으로 꼽히는 수필 '지조론(志操論)'에 매서운 기개와 차가운 지성이 드러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자는 따를 수가 없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수필가로 활동하는 장남 조광렬씨는 "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 제자들, 친구들, 시와 학문, 몸담았던 학교, 나아가서는 나라에 더 큰 사랑을 쏟으셨다"면서 "그럼에도 제가 본 가장 훌륭한 분이었고 가장 멋있는 분이었다"고 했다.

          1950년대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찍은 조지훈 집안의 가족사진. 시인(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아내 김난희씨, 장남 광렬, 차남 학렬, 딸 혜경씨. 막내 조태열 차관만 빠졌다. /조지훈가 제공

1968년 48세에 세상을 뜬 시인은 3남 1녀를 두었다. 셋째 아들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은 자신을 이끌어준 최고의 스승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셔서 직접 훈육받은 기억은 많지 않지만 그 이름이 등대가 됐다"고 했다. "공직 생활 하면서 내가 조지훈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잘하셔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하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말자고 다짐하며 살았다"고 했다.

성북동의 작은 한옥, 아버지는 늘 서재에 꼿꼿이 앉아 원고를 썼다. 조 차관은 "유교적 가풍에다 잔정을 표현하는 분이 아니라 막내라도 어리광을 부려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세상은 아버지를 기개 넘치고 호방한 대인으로만 기억하지만 두 달 전 가져온 성적표를 가져가는 개학날이면 '로 세심한 면도 있었다."

◇세 가지를 빌리지 마라

'지조론'은 가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지훈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 주실(注室)마을은 한양 조씨들이 400년 가깝게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 '검남(劍南)' 집안이라고도 불린다. '칼 같은 남인 집안'의 가풍 속에서 조지훈은 태어나고 성장했다. 노론에 밀려 벼슬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검남'이 택한 가훈이 '삼불차(三不借·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 ①재불차(財不借):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물을 빌리지 않고 ②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으며 ③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것. 조태열 차관은 "삼불차는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집안의 자존심 같은 것"이라며 "양자 없이 적통을 계속 이어갔다는 건 끊임없이 인물이 배출됐다는 자부심의 표현일 것"이라고 했다.
1960년 5월 3일 '고대신문' 1면에 스승의 헌시가 실렸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피를 흘린 제자들에게 바치는 조지훈 고려대 국문과 교수의 시였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조 차관은 "4·19 세대가 가장 많이 감격하고 기억하는 시"라고 했다.

조광렬씨는 2007년에 출간한 책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에서 이렇게 썼다. "잔정 어린 살가운 추억과 통속적 재미, 재산은 남겨주시지 못했지만 그 대신 고상한 정신을 듬뿍 선물로 주신 아버지, 당신이 추구하는 것이 옳다면 왜 그것이 옳고 좋은가를 말씀 대신 몸소 몸으로 보여주신 아버지였다."

 

[이 집안의 보물은] 121편 실려 있는 '육필 시집'

          

조지훈이 만년필로 정서(正書)한 시를 묶은 '육필 시집'은 집안 가보가 됐다. 시인이 생전에 직접 노끈으로 묶었던 원고를 정리해 지난 2001년 출간됐다. 대표작 '승무'(사진)를 비롯해 조지훈의 시 121있다. 꼿꼿하고 힘 있는 서체에서 시인의 문기(文氣)가 느껴진다. 조태열 차관은 "붓글씨를 잘 쓰시는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 글씨는 썩 좋지 않아서 그런지 육필을 많이 남기지는 않으셨다"며 "두주불사였던 아버지는 술을 아무리 드셔도 새벽에  글을 쓰시곤 했다. 그 모습이 그립다"고 했다.

 2013.11.18 (조선)

 

[전통의 눈으로 본 이 집안 교육법]

 

修成淑德 施及子孫(수성숙덕 이급자손)
좋은 덕을 닦아 놓으면 그 덕이 자손에게 이어진다
-후한서 두융열전

 

어떻게 하면 아들딸을 건강하고 한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많은 부모들의 한결같은 고민이다. 교육을 잘 시키고, 재산을 넉넉하게 남겨주면 될 것만 같아서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쓴다. 하지만 애쓴 보람과는 딴판이기 쉽다. 2000년 전 사람은 말한다. 스스로 훌륭한 덕을 갖춘 사람이 돼라! 자신이 덕망을 갖추고 남에게 베풀면 그 덕이 자연스럽게 자식에게 옮겨간다. 자식의 미래를 위한 치밀한 기획에 앞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 돼라! 자식은 그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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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은 네 것", 이 멋진 아빠와의 인터뷰  

            

                  

4년제 대학대신 미용학원 택한 딸… 억지 공부하느니 기술 배운다 선언
파마·염만 넘어지고 다쳐봐야 '진짜 인생'
'내 삶은 내 것' 우직하게 걸어가는 우리 딸, 고맙고 자랑스럽지요                   

아이고, 인터뷰라뇨. 하품하던 소, 웃다 사레 들려요몰려와 막 응원하잖아요. 으아~ 완전 당황했어요.

4년제 대학 대신 미용학원 택한 딸아이의 결단, 뭐, 쉬운 일은 아니었죠. 저희 부부도 처음엔 아주 황당했어요. 고3 시작된 지 며칠 안 됐는데, 이 녀석 할 얘기가 있다는 거예요. 영·수 학원 다녀봤자 성적 안 오르고, 공부엔 취미가 없으니 '듣보잡대' 간다고 학원비 날리느니 미용 기술 배우겠다는 겁니다. 가슴이 쿵 떨어지데요.

저희 부부 다 서울대 나왔거든요, 흐흐! 돌연변이 아니라면 머리가 그리 나쁘지 않을 거고, 1년 바짝 노력하면 수도권 대학은 못 가겠나 했던 건데, 덜컥 미용사가 되겠답니다. 황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겁없는 아내, 대뜸 '일리 있는 소리네' 이럽니다. 중학교 선생이거든요. 공부 억지로 시켜 엇나가는 애 여 나온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면서. 학원 가서 조느니 기술 익히는 게 낫다, 학벌 거품 꺼지면 기술 장인 우대할 날 온다, 희망을 주창하니 저 또한 '네 인생 네 것이다' 박수 쳐주었지요.

학교 파하는 대로 미용학원으로 달려가더군요. 2학기부터는 직업학교에 다녔어요. 인문계라도 학교에 적을 둔 채로 직업특성화고등학교에서 수업받을 수 있더라고요. 재미있어하느냐학원 다닐 때보다 생글생글하니 싫진 않은가 봐요. 문제는 손이에요. 파마다, 염색이다 해서 독한 약품 다루니 물집이 생기고 갈라집니다. 어려서 아토피를 앓았거든요. 어느 날 보니 양쪽 엄지 지문이 다 사라졌어요. 장갑 좀 끼고 하래도, 처음 배울 땐 손에 감각 익히는 게 중요하다며 고집을 피웁니다. 간만에 아버지 노릇도 했지요. 알음알음 알게 된 헤어숍 원장에게 딸아이 멘토링을 부탁했어요. 대충대충 해선 이 바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대학 안 가도 교양과 상식은 쌓아야 한다, 미용사라고 머리와 피부만 만져주는 게 아니다, 고객 고민 듣고 조언해줘야 진정한 서비스가 완성된다…. 아, 어느 길이든 쉬운 게 없더라고요.

말이 씨가 된 거였어요. 그 녀석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 삼아 모교에 놀러 간 적 있어요. 버들골이라고 널찍한 공원 있거든요. 풀밭에서 뛰놀고 김밥도 먹으면서 부부의 속물적 희망사항을 주입했죠. 여기가 학비도 싸고 캠퍼스 넓어서 좋더라, 엄마 아빠 때와 달리 요즘엔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애도 많이 온다더라…. 그러자 딸애가 두 눈을 빛내며 물어요. '그러니까 우리 식구 중 두 명이나 서울대 다닌 거야? 그럼 난 대학 안 가도 되겠네?'

                                               

아이가 딱 한 번 비상한 재주를 보인 적 있어요. 열한 살 때 포털에 카페를 만든 겁니다. 어디서 포토숍이란 걸 보고 배워서는 카페를 열었는데, 개설 두 달 만에 회원이 8000명을 넘었지요. 완전 대박이죠. 20대 대학생, 직장 여성들이 회원이고 초딩 딸내미가 시솝이니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와요. 이으면 한국판 샌드버그 됐을 건데…. 울면서 회원들 강퇴시킨 뒤 아이 성격이 뾰족해졌어요. 시무룩해지고요. 자유로운 영혼을 학교 정규 프로세스에 가둬둔 셈이니. 수틀리면 '내 인생은 내 거야!' 악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니, 소원니다, 하하!

딸아이 수능시험 본 날 식구가 함께 63빌딩 갔어. 대학 안 갈 건데 시험은 왜 봤느냐 물었더니, 수험표 있으면 밥값 깎아주는 식당이 득시글하대요. 밥 먹다 말고는 복장 터지는 소릴 합니다. '아빠 말이 맞았어. 국영수 열심히 해서 대학 가는 게 제일 쉬운 길이었어.'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이 내 생각 남의 머리에 넣고, 남의 돈 내 주머니에 넣는 일이라더니, 욱하데요. 한편으론 안도했죠. 헤어든, 메이크업이든 파고들다 보면 선진 기술 욕심 날 테고, 공부의 필요성 절감할 거고요. 100세 시대에 서른은 청춘이니 나이 들어 대학 가도 꿀릴 거 없지요.

말은 이래도, 곧 있으면 교복 벗을 아이의 뒷모습 보니 울적합니다. 다른 내려가 직접 밥해주며 공부시킨 아빠도 있던데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응원해주려고요. 자기 주도 학습은 못 했지만 자기 주도 인생 선언한 멋진 내 딸에게 둘도 없는 '백' 돼주려고요. 넘어지고 굴러서 무릎에 피도 나겠지만, 그래야 '인생' 아닌가요? 곱창 좋아하는 내 딸 정식 미용사 되면 소주잔 힘차게 부딪치며 '브라보!' 외칠 거예요. 그때는 '딱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협박하려고요. 검붉게 부르튼 너의 손 보고 아빠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려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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