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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면 동치미국에 메밀국수 말아먹던 詩人 백석

입력 : 2012.01.02 23:06

올해는 평안도 시인 白石 탄생 100주년
희스무레하고 수수하맛의 詩語
가슴에 고드름 달린 명태처럼 쓸쓸한 시인
긴 겨울밤에 읽을수록 더 깊은 맛이 난다

올해로 백석(1912~1996) 시인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이 어렸을 땐 고향에 폭설이 내리면 산토끼가 눈구덩이에 빠졌다가 사람들 손에 쉽. 겨울엔 꿩 사냥도 제철을 맞았다. 집집마다 메밀가루로 구수한 국수를 만들고, 꿩과 토끼고기를 얹어 차가운 동치미국에 말아 먹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시 '국수' 중에서)

백석은 1941년 시 '국수'를 발표했다. 국수 가락처럼 길게 이어져온 고향의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음식 축제를 회상한 시였다. 백석은 미각(味覺)을 통해 한국인의 심정(心情)을 감노래한 서정시인이었다. 그가 남긴 시 100여 편에는 100가지가 넘는 음식이 등장한다.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찰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鰍湯)집의 부엌은 뜨스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따끈한 35도 소주나 한잔 마시고 그리고 그 시래깃국에 소피를 넣고 두부를 두고 끓인 구수한 술국을 뜨끈히 몇 사발이고 왕사발로 몇 사발이고 먹자'.

백석에게 맛은 곧 말[言語]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듯이 평안도 사투리를 혀에서 굴려 시를 썼다. 원래 시는 말의 자연스러움이 낳은 예술이다. 프랑스 화가 드가가 시인 말라르메를 만나서 "내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 차 있으니 나도 시를 쓸 수 있겠다"고 하자 말라르메는 "여보게, 시(詩)란 말이지, 그건 말로 쓰는 거지 생각으로 쓰는 게 아니네"라고 충고했다. 백석은 시가 말의 예술임을 깊이 의식했다. 평양 오산고보를 나온 백석은 1930년 정주 출신 광산 사업가로 뒤에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계초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4년 동안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영어와 러시아어에도 능통한 모던 보이였지만 시를 쓸 때는 관념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고사투리를 풍성하게 활용해 향토색이 짙은 풍경을 빚어냈다.

 

백석의 시는 추운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그는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며 자화상(自畵像)을 그렸다. 그의 시 세계에는 여우가 석이 남긴 겨울의 절창(絶唱)이라면, 이루지 못할 사랑의 동반자였던 기생 자야(子夜)를 그리워하며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며 찬술을 홀로 들이켜는 백석의 슬픈 눈매가 떠오른다. 그는 흰 당나귀에 연인을 태우고 설원(雪原) 너머로 도망가기를 꿈꿨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광복 이후 평양에서 고당(古堂) 조만식의 통역 비서로 일했던 그는 분단이 굳어지자 던 연인과 재회하지 못한 채 재북(在北) 시인이 됐다.

북한에서 백석은 '복고주의 시인'으로 낙인찍혔다. 그는 1957년 북한에서 아동문학 논쟁이 일어났을 때 "계급적 요소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가 비판받고 양강도협동조합으로 쫓겨났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북한 체제 찬양시를 몇 편 썼다. 월북한 동료 문인 중에서지 지낸 소설가 한설야가 구명(救命) 운동을 벌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2년 한설야마저 숙청되자 백석은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30여년 동안 문학사에서 사라진 그는 1996년 1월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북쪽에서 잊힌 백석은 1987년 우리 정부의 납·월북 작가 해금(解禁) 조치 이후 젊은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배 시인이 됐다. 백석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인 안도현은 꿈속에서 '백석 선생의 마을에 가서'란 시를 쓴 적이 있다. 꿈에서 그는 늙은 백석이 국수나 한 사발 먹고 가라고 하자 '여기서 한 백년쯤 잠들었다 일어나면/ 맑고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태어날 것 같았다'고 했다.

올겨울에 눈이 푹푹 내리는 밤, 젊은 시인들이여, 동치미국에지도 모른다. 백석의 백세(百歲) 잔칫상에 따뜻한 술 한 잔 올리고 기분 좋게 취해서 돌아오라. 깨어나면 우리에게 고운 사랑의 노래를 쉼 없이 들려주라. 그렇게 올 한 해 동안 백석 탄생 100주년을 흥겹게 눈물겹게 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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