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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그림이 '돈 장난'만은 아닌 까닭

 

 

 

 

      畵才는 속으로 삼키고 화가 후원해 그림 모은 목포 기업인 李勳東…

 

      참된 미술품 소장가는 '돈벌이 수집狂' 아니라 '보는 기쁨' 아는 이들

 

    부친 遺作 감격하고도 두고 떠난 遺腹女처럼

                 

 건축 여행이 유행인 요즘, 목포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훈(李勳東) 정원'이다. 이 지역에 남아있는 최대 규모의 일본식 정원이라는 기업인이다.

그의 호를 딴 '성옥(聲玉)기념관'을 들르게 된 것은 정원을 보려면 기념관을 먼저 관람해야 한다는 안내문 때문이었다. '시골 부자의 뻔한 기념관일 것'이란 예단은 틀린 것이었다. 우리 근대 한국화 대표 화가의 수작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그야말로 눈 호사농 허건, 운보 김기창,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이당 김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기념관에 청해 그의 자서전을 읽어봤다. 이훈동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세살까지 서당 공부를 한 게 다였지만,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한번 본 규수의 얼굴을 똑같이 그려내 '남의 딸 얼굴을 사진 찍어 걸어놨다'는 신고로 주재소에 끌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사업으로 일가를 이룬 후, 그는 남도의 소리꾼,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밥과 술을 대접하고 그림도 사줬다. 그림과 소리를 잘하고 좋아했던 그였지만 문화 생산자가 아닌 '문화 소비자'로 남아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먼 길 가길 꺼리지 않았던 간송 전형필 가문과 호암 이병철 가문뿐 아니라, 크게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숨은 소장가들이 지켜온 것이 우리 근현대 미술 100여년 역사
지금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명화를 만나다―한국없이 산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거창한 재력가는 아니다. 그림이 다락같이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산 경우보다는 "그냥 그 그림이 자꾸 생각이 나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 산 사람들이다.

미술 학원으로 돈을 번 화가가 이런 말을 했다. "뭐가 크게 잘못됐다. 미술 학원 하는 나는 벤츠를 타지만, 정작 그림 그리는 사람은 밥 먹고 살기도 림 사는 데 돈을 쓰는 층이 매우 얇기 때문이 장난'친 기업인이 여럿 발각되면서 진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는, 보는 기쁨은 따로 있다. 이훈동의 자서전 중 한 대목이다.

〈어느 날, 목포 집에 한 처자가 찾아왔다. 자신을 허림(許林)의 딸이라고 했다. 허림은 한국화 대가 남농 허건의 동생으로,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스물다섯 나이로 요절한 인물이다. 찾아온 이유는 이랬다. "오늘 오후 3시에 제가 결혼합니다. 저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뵙지 못하고 계시다기에 결혼 전 아버지 뵙듯 그림을 보고 싶어서…." 허림의 그림은 야트막한 야산을 개간한 밭 풍경이 크기의 그림을 오래도록 보다가 흐느껴 울었다. 그림을 결혼 선물로 주겠다는 내 말에 처녀는 "그 그림은 회장님이 갖고 계셔야 더 빛난다. 본 것으로 족하다"며 재빨리 집을 떠났다.〉

움켜쥐면 한 줌도 되지 않을 그림 한 장이 유복자(遺腹子) 처자에게는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숨결이자 살결이었다. 그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 2014.02.22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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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해 구워 온 옹기, 아들은 좋아서 한다는군            

 

 

    

      

[160년 옹기家 황충길 父子]

'옹기 굽는 상놈' 싫어 그만두려고 악착같이 구워 딴일할 돈 모았죠
그런데 꼭 벌 받듯이 가족이 아파… 마음 잡으니 名匠 호칭에 富까지
난 눈어림으로, 아들은 저울로 작업… 신기하게도 만들고 나면 거의 같아

지난달 23일에 문을 연 서울 상암동 중소기업역사관에는 옹기 다섯 점이 전시돼 있다. 김칫독 하나와 그릇 네 개다. 개관식 날 이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는 이 옹기를 만든 명장 백(생몰 미상)이 옹기를 만든 이래 164년이 되었다. 전통예산옹기는 충남 예산 오가면 점촌마을에 있다.

황춘백은 천주교도였다. 19세도들기도했다. 지금도 전국에 40여 군데 있는 옹기회사 사람들은 90%가 천주교도다. 故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도 옹기장이였다. 그가 만든 장학회 이름은 옹기장학회다. 옛 옹기들을 보면 매화꽃, 난초, 붓 흔적으로 숨겨놓은 십자가 무늬를 찾을 수 있다. 황충길도 "나는 태중(胎中)부터 천주교도"라고 했다.

 명장 황충길이 아들 황진영에게 가르침을 준다. 유약 바르지 않은 커다란 옹기들이 가르침을 함께 듣는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태중부터 옹기장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만 하면라도 더 팔아야 돈 벌어서 이거 관둘 수 있으니까."

그런데 돈이 좀 벌리면 꼭 누군가가 아팠다. 어머니가 아프더니 그다음에는 찾을 자금 벌어놓으면 몽땅 병원비로 흘러갔다. 황충길은 "딴생각한 죄로 하늘이 내린 벌"이라 결론 내렸다.

옹기는 흙으로 만든 그릇에 솔가루와 콩깍지 잿물로 만든 유약을 발라 1300도 고온으로 한 번 구워 만든다. 미세한 구멍은 공기 분자보다 크고 물 분자보다 작다. 김치 같은 발효 식품을 저장하는 용기로는 딱이다. 중국산 상품이 온갖 곳에서 주름잡지만, 옹기 시장만은 맥을 못 쓴다. 황진영(42)은 "발효 식품 문화에 맞춰 진화해온 옹기의 '숨구멍'이 중국 옹기에는 없다"고 했다. 황진영은 황충길의 아들이다.

1996년 황충길이 만든 냉장고용 김치 항아리가 제1회 농민예 부문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1998년에는 공예 명장에 선정됐다. 옹기 부문으로는 처음이다. '명장'이 된 랍니다." 1997년이다. 황충길이 말했다. "애들만은 여기를 탈출시키려고 초등학교 때부터 대전으로 쫓아냈다. 그런데 진영이는응하지 못하고 1년 만에 돌아왔다."

운명은 그런 것이다. 군대를 갓 제대한 진영은 이 선언과 함께 혜전대학 도예과에 입학해 '과학적'으로 옹기를 공부했다. 그리고 아버지 회사에 일하던 한양여대 도예과 학생 강현숙과 결혼했다. 지금 이 옹기장이 부부는 "아버지의 느낌과 손맛을 과학적인 데이터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이 싸운다버지의 눈어림이 틀려 보였고 아비에겐 저울과 자와 카메라로 일일이 계량을 하고서야 흙을 개는 아들이 답답했다. 그런 보니 아버지의 눈어림과 아들의 과학적인 분석이 거의 동일한 게 아닌가. 아들이 말했다. "선대부터 아버지까지 축적해놓은 경험치가 바로 과학이었다. 나는 그걸 객관화해서 더 쉽게 만들 방법을 찾는 거고."

4대로 이어진 예산옹기가 한 해 매출이 10억원이 넘는다. 더 이상 몰른들은 먹고살려고 시작했지만 나는 일이 좋아서 한다. 내 아들도 잇게 하고 싶다." 누가 아는가. 할아버지가 만든 옹기를 바라보던 그 아이가 또 흙을 만지고 가마에 불을 지피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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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란엔 서걱이는 대밭, 뜰엔 햇볕과又下亭)

남은 일
- 서정태

걸친 것 다 벗어버리고
다 그만두고
초가삼간 고향집에 돌아오니
알몸이어서 좋다
 
아직은 춘분이 멀어서
바람끝 차가웁지만
방안이 아늑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바깥세상에 한바탕
꽃피는 걸 바라다볼 일일뿐

 

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정태 선생은 생가 바로 옆의 터를 사 삼간(3칸) 하나에 아래채 하나를 지었다. 선생이 아래채 문턱에 앉아 웃고 있다. 안성식 기자 


미당 생가 아래, 8살 아래 아우의 황토집

프랑스 루르드 샘물에 이어르마늄 온천이 솟고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으며 전국 바지락의 70%가 생산되는 곳은? 대량의 고인돌 유적지가 발견되고 나라 안에서 를 드리겠다. 복분자의 당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으며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풍천에서 유독 살찐 뱀장어가 잡히는 고장은? (풍천장어는 먹장어, 붕장어, 갯장어가 아닌 뱀장어다.

짐작대로 답은 고창이다. 그러나 고창을 고창이게 만드는 진정한 명물은 복분자와 풍천장어가 아니고 소나무와 바지락도 아니다. 바로 선운사와 동백과 미당이다. 선운사와얽혀 있어 누가 먼저인지를 따지는 건 부질없다. 그렇다. 지령은 인걸이다. 한 고장의 내력을 완성하는 것은 산맥과 물길과 특산물이 아니라 그 땅의 지수화풍으로 빚어진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가 없는 선운사 동백은 싱겁고 지루하고 평범할 뿐이다.

1 우하 선생의 집은 왼쪽으로는 생가를, 앞쪽으로는 선산을, 뒤뜰에는 대밭을 두고 있다.
2 집은 좁지만 마당은 너르다. 찾아오는 이가 많을 땐 우마루에, 손님들은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3 선운사 도솔암을 찾아 진용 스님과 차를 마시며 환담을 하고 있다. 아흔이 넘은 우하 선생은 지팡이를 짚고 도솔암의 돌계단을 혼자 힘으로 올랐다.
 


작년 올해 고창 걸음이 잦았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면서 차츰 고장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엔 마당의 손아래 동생이 산다. 미당 생가 바로 곁에 초가삼간을 지었다. 우하 서정태. 올해 나이 아흔둘(이하 한국나이 기준). 1915년 생 미당이 살았으면 100세니 8살 아래 아라 그 빛에 가렸지만 우하도 진작부터 시인이었다. 재작년 아흔 나이에 그동안 쓴 시 아흔 편을 추려 두 번째 시집을 펴냈다. 피붙이도 아내도 다 떼어버리고 지금 혼자다. “자유를 얻고 싶었어. 하느님, 부처님 같은 절대신으로부터도 해방되고 싶었어. 혼자 살지 않으면 그런 거 못 얻잖어?”
 귀가 어두운 것도 아니다. 해맑은 피부에 천진한 미소를 띠고 짜랑짜랑한 음성으로 혼자 사는 기쁨을 말한다.

“내 전 생애를 통틀어 요즘이 가장 좋아. 요사이 말로 하면 그 뭐라드라 행복해. 내 시 중에 ‘자족’이란 게 있어. 들어볼래? ‘보리 섞인 밥 한 공기와/무국과/ 김치 한 접시/김 두 장/아침상 차려먹고 나니 /천하는 내 것이다//고샅길에 나가면/ 어린아이들/저희들끼리 놀다가도 할아버지 달려오고/젊은 아낙도 머리 숙여 인사한다// 하늘이여/고운 하늘이여/ 티없는 하루가 되게 하라’ ” 정말 더 바랄 게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미당 글자 그대로 삼간(3칸)이다.

조선 민초들의 초가삼간은 방 하나 마루 하나 부엌 하나로 초간결하게 구성됐었지만 지금 우하의 우하정은 엄밀히 말하면 원룸이다. 방 윗목에 간편한 싱크대를 둬서 부엌을 방에 들이고 대신 욕으로 당겼다.경 오는 사람이 하루 스물 나마 돼. 번거로와서 곁에다 조그맣게 따로 하나 지었어.” 우하의 말은 담백장이 짧고 핵심단어가 적확해 논리와 통찰이 번득인다. 게다가 은은한 무늬처럼 위트가 담겨 있다. 노인이 되면 기억력이 감퇴하고 문장이 느슨해진다는 건 생각 짧은 젊은이들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무릎까지 오는 낮은 돌담 안으로 해당화를 심어 울타리로 삼았다. 지금은 마른 열매만 남았지만 봄이면 해당화 향기가 마당을 가득 채운다. 

아흔 넘어까지 시 써 … 시의 신 접신 공간

우하가 뭔 뜻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또 아래라는 거지. 내가 미당 저 냥반의 동생이고 집도 바로 아래 있잖아. 그래서 또 아래야. 허허. 겉으로는 겸손한 듯하지? 그런데  아주 건방진 이란 양반이 있거든. 그 양반 호가 사가정(四佳亭)이야. 정정정(亭亭亭)이라고도 해. 내 위로 그런 정(亭)들이 자꾸 있다는 거거든. 나도 그 계열의 하나라는 거니 여간 건방진 게 아니지.”

작은 초가를 흙으로 짓고 싶었다. 생가도 초가였으니 기와를 얹기는 싫었다. 집 둘레에 꽃이나 잔뜩 심고 내다보고 싶었다. 헌 집 허무는 목재를 구해와 기둥을 삼고 황토에 짚을 썰어넣고 두어 달 만에 뚝딱 지었다. “이 고장 황 견디겠더라고! 벌레가 말도 못해. 노린재가 냄새를 피워 싸서 살 수가 없어. 한 2년 살다 짚을 벗겨내고 강판기와로 바꿔부렀어. 지붕을 걷으면서 굼벵이가 한 말은 나왔을걸. 전부 매미 유충이지. 그놈들이 땅려가고 초가지붕 아래서 살더라고!”

살림은 단출하디 단출하다. 1989년에 고창에 내려왔으니 혼자 산 지 25년째. 그러나 허투루 짐을 늘리지 않았다. 오로지 시를 생각한다. “남에게 보이려고 쓰는 건 아니야. 나 좋자고 쓰지. 혼자 읽고 있시 쓰는 사람은 황금찬하고 나밖에 없을걸. 시바타 도요라든가, 99세 일본 할머니가 쓴 시도 읽어봤어. 별 재미는 없더군.”

본채는 3칸이지만 손이 오면 묵을 방이 필요할 듯해 아래채로 1.5평을 더 지었다. 그런데 묵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방문 앞엔 작은 툇마루를 뒀고 뜰에도 평상을 놓았다. 을까지 죽 거기 앉아서 앞산을 본다. 앞산엔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가 있다. “여기 사는 건 말하자면 시묘살이야. 저기 하얗게 보이는로 가겠지.”

앞산에 부모·조부모 산소 있어 시묘살이

질마재에 살고 있는 미당의 동생에게 나는 정말 묻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질마재는 세계문학사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신화적이고 원시적인 공간이다. 상상만으로 탐미적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이다. 게다가 행정명도 선운리다. 신선과 구름은 도무지 이승의 이름들이 아니지 않은가. 질마재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오줌줄기가 뜨거운 이생원네 마누라, 소박맞은 한물댁, 다홍치마와 초록저고리를 입은 채 첫날밤에 재가 된 신부, 마당에 들어머에서 툭툭 튀어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 그렇게 우리는 미당 시의 아름다움 앞에 전율한다.

그러나 ‘한국어가 감당할 수 있는 감각의 가장 아스라한 경지’(고종석)에 도달했다는 것을 아무도 반론하지 않는 채로 미당은 지금 우리에게 고통이고 원죄다. 미당 시를 사랑하는 시인들이 미당문학상을 아프게 거부한다. 앞으로도 미당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폄훼와 상찬이 뒤섞일 것이다. 그런 형을 아우는 가 무입을 떼면 미당을 편든다고 할 거 아냐. 근데 말이야. 44년에 미당이 고창경찰서에 잡혀가 있었어. 동네청년들이 연극을 했는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나봐.

누구의 영향을 받았느냐고 캐물으니까 서정주라고 불었나봐. 옥살이를 경험해보니 더 살아남고 싶었겠지. 일본에 아양을 떠는 게 진심이었겠어? 미당이 가장 아끼는 동생이 나란 말이야. 45년 3월에 소집영장이 나왔어. 그걸 들고 미당이 배상기라는 가야금 명인과 같이 날 찾아왔드라고! 초조했겠지. 동

상처를 들쑤시는 건 서로 고통스럽다. 대신 선운리 얘기를 하자. “지금 말고 꽃 피고 새가 울거든 술 한잔하러 와. 술은 은근히 취해야 해. 독한 술 말고 복분자술이 젤 낫지. 복분자도 선(禪)자를 쓰거든. 그 절이 있는 산은 또 도솔산이야. 그래 그런지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정 많고 놀기를 좋아해. 부자가 없고 벼슬도 못해. 가난한데 다들 인정이 많아.”

우하 선생에게 날 데려간 이는 고창 봉암초등학교의 최석진 교장이었다. 해송이 자라는 너른 운동장과 별채로 아담한 도서관까지 가진 봉암초등학교는 한때 전교생이 1000명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학생 수가 35명밖에 되지 않는다. 최 교장은 아토피로 고생하는 도시 아이들을 위해 해풍과 햇볕과 황토집과데…. 이 좋은 학교를 비워두고 놀리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무진장한 햇볕과 바람과 숲을 아이들의 놀이터와 치유처로 삼는 작업은 지역 기업인 ‘고창황토’의 도움을 받아 지금 착착 진행 중이다. 그 최교장의 뜻과 꿈이 드높아보였기에 그가 가장 존경하는 ‘어에 시를 발표하고 48년 모윤숙이 하던 ‘문예’라는 잡지에 매월 시를 실었거든. 미당은 뭐 두세 달에 한 번 싣는 정도야. 6·25가 날 때까지 미당과 공덕 집에 함께 살았지. 집에 여류시인들이 오면 미당을 안 보고 자꾸 나를 봐. ‘누구야?’ 물으면 ‘내 아우야. 나보다 미남이지?’ 해. 내가 미당보다 얼굴이 잘생겼거든. 그게 질투가 나서 칭찬을 안 했나 봐. 하하.”

 

“울타리 전부가 해당화, 꽃 피거든 와”

우하에게 들은 흥미진진한 얘기를 어찌 다 옮기랴. 사람은 모름지기 90 넘게까지 살고 볼 일이다. 역사와 문학과 리얼다큐가 압축된 서사가 섬세하고 담백하부 건물을 그대로 썼어. 거기 301호실이지. 미군들에게  그리로 갔지. 상해임시정부에서 온 분들이 만든 신문이지.

김규식 박사가 회장이고 임정 선전부장 하던 엄항섭이 사장이야. 사회부장 김광섭, 정경부장 오종식, 문화부장 안석주, 문화부 차장 김광주야. 김광주는 소설가는 기생이 아니라 풍류를 아는 기생!하고 시를 짓고 기악을 하는 기생이 다른 곳엔 없어도 전주에는 바글바글했거든.” 나는 정말 아랫방에 묵으며 2박3일 우하 선생의 이야길 듣고 싶

그런데 우하 선생이 말린다. 해당화가 피거든 다시 오란다. “울타리 저게 전부 해당화야. 문을 열어놓으면 향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미당 생가에 구경 온 여자가 있으면 불러세워해. ‘거 해당화 한 이파리 따 먹어보오!’”

시는 저 멀리 아득한 높이에 있지 않다. 우하에게 와서 그대로 삶이 되었다. 슬하에 2남2녀, 손주도 여덟이다. 그 손주들이 의사에, 회계사에, PD라고 자랑하지만 자식들과 함께 사는 것은 절대 사절이다. “나를 혼자 두는 것이 효도야. 인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사는 거지. 그 바탕에 깔린 것이 정인데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정을 시로 쓸 거야.” 집 뒤란엔 서걱이는 대밭, 뜰엔 햇볕과 적막. ‘무엇을 더 바라랴/ 무엇을 더 보랴’(우하 선생의 시 ‘어떤 풍경’)

 

뭇국과 김 두 장으로 밥을 먹은 우하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앞산을 바라본다. “그래서 절대 자유를 얻으셨나요?” 나는 어쩐 일인지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허, 그게 맘대로 되나? 몸뚱어리가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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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전투수당' 하루 1달러

난 젊음을 불태우며 살았습니다. 단 한 번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못 배운 無識, 못사는 우리나라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볼펜으로 정갈하게 쓴 장문의 편지였다. "채명신 파월사령관 전기(傳記)를 

"왜냐하면 당시 그분이 내 대대장님이었고, 고(故) 강재구 소령은 중대장님이었으니까요. 파월(派越) 직전 중대장님이 숨진 수류탄 사고는 함께 훈련하던 중 일어났지난 일이 벌어졌지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히 떠오르는군요."

그러면서 그날의 일기(日記)를 편지에 소개했다.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내 일생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자, 이 수류탄의 위력을 봐라.' 큰 소리로 수류탄 투척 요령을 일러주시던 강재구 중대장님이 불과 몇 분도 되기 전 잘못 던진 수류탄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내 동료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려다 그만 실패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사랑하는 부하들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낸 '인간 강재구 대위님', 나는 그 위늘같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제법 어른스러운 감상까지 덧붙였다. "신병중대 때부터 나와 같이 붙어 다니던 박○○도 부상을 당해 후송을 갔다. 그가 찼던 탄띠를 힘없이 둘러메고 귀대하니 가슴이 답엄했던 중대장님을 이제 볼 수 없게 됐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편지를 보내온 그는 경기도 김포에서 농사짓던 집안의 9남매 하다가 입대했다. 월남 파병 부대에 지원한 것은 "다른 이유보다 그때 젊음의 기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전투 보병으로서 '맹호 5호 작전' 등 두 차례 사단급 작전에 참여했

"1966년 1월 18일 화요일 맑음. 대대장님이 우리 쪽으로 오시더니 중대장님에게 '비겁하게 후퇴하는 자 있으면 쏴! 내가 책임진다!'고 명령했다. 자그마한 대대장님의 허리에 찬 권총이 오늘 따라 꽤 커 보인다."
 일일이 사병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악수하는 모습에 그는 "이런 분 휘하에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썼다. 그러면서 채명신 파월사령관의 그때 연설을 적어놓았다.
"여러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은 애국자다. 지금 우리가 흘리는 피와 땀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발전해가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여러분이 받는 전투수당을 아껴 본국에 송금하면드시 기억되고 보상을 받을 것이다."

사병의 전투수당은 하루 1달러였다. 그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송금했다고 한다. 그가 1967년 10월 귀국 전역했을 때 국내에는 무장 공비(共匪)들이 빈번하게 출몰했다. 후방의 국가 주요 시설 보호를 위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을 뽑았다. 그는 자동 카빈 소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채 경춘선의 강촌 구간 철도를 지켰다고 한다.
깥세상의 큰물을 한번 먹어보자"며 지원했다. 그는 1970년부터 딘스라켄 근방의 탄광에서 일했다. 의무 계약 기간 3년 동안 결근이나 병가(病暇) 한 번 없었다. 휴일에도 쉬지 않고 일했고, 심지어 8시간 근무를 마친 뒤 지상에 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탄광에 들어가는 '더블 근무'도 했다고 한다.

"내게는 집안 배경도 학벌도 없었어요. 오직 가진 것이라고는 젊은 몸뚱아리뿐이었으니까요. 살기 위해 죽어라고 일했지요. 그때 집에 보낸 돈으로 부모님은 전답을 장만했고, 여교를 마칠 수 있었지요."

그는 1976년까지 연장 근무를 했고, 거기서 만난 파독 간

"그야말로 젊음을 불태우며 살았습니다. 단 한 번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못 배운 무식, 못사는 우리나라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바쁘신 분에게 너무 긴 편지가 되고 말았네요. 수원에서 이범영 올림."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평범하지만 비범했던 사람의 육성(肉聲)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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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 고름을 빨았

 

4년 전 오늘 밤 9시45분, 백령도 바다는 새까만 어둠에 덮여 있었다. 검은 바닷속에서 검은 물체가 움직였다. 먼바다를 돌아온 북한 잠수함이었다. 검은 배는 검은 어뢰를 쐈다. 46명이 검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은 모든 게 검정이었다.

 전쟁 중이라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은어갔다. 천안함은 검은 비극이었다.

 기자 생활 30년 동안 나는 수많은 사건을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천안함은 특이하다. 비극이지만 뜨겁고 공포스럽지만 전설적이다. 천안함이란 드라마에는 영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두 사람이다. 잠수하다 순직한 한주호 준위와 북한 어뢰를 건져 올린 김남식 선장이다.
 신문에서 ‘천안함’을 볼 때마다 나는 한주호를 생각했다. 그는 어떤 인간인가. 어떤 인간이길래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며칠 전 나는 진해 UDT부대에 갔다매달려 있다. “깡 깡” 총알이 철판을 때렸다.

 부단장 권영대 대령이 교관을 불렀다. 김원인 상사다. 그는 아덴만 해적 진압 때 허벅지에 총알을 맞았다. 그는 “걷는 데 불편은 없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바

 단장 오고산 대령이 UDT 역사관을 보여주었다. 한 준위가 입었던 잠수복이 있다. 고무 옷은 가위로 잘라져 동강 나 있었다. 오 대령이 말했다. “의식을 잃은 한 준위를 급히 산소치료기에 넣기 위해 잠수복을 찢었습니다.”

 4년 전 그날 천안함이 침몰하자 해군은 잠수요원들을 해선 하루에 한 번만 작업해야 했다. 그런데 한 준위는 이틀에 네 번이나 들어갔다.

 사고 전날 저녁 한 준위는 지쳐서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지휘팀장 권 대령은 다음 날 작업조에서 그를 뺐다. 권 대령은 회고했다. “밤늦게 일어나 명단을 보더니 한 준위는 몇몇 후배 이름을 지웠습니다. ‘얘들은 경험이 적어 잘못하면 사고 난다’며···. 그러곤 자기 이름을 넣었습니다.”

 권 대령은 1989년 UDT 교육을 받았다. 교관 중 한 명이 한주호 상사였다. 한 상사는 호랑이 교관이었다. 그런데도 훈련병들은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권 대령의 증언. “뻘에서 뒹굴면 상처가 많이 생깁니다. 제때 치료하지 못하니 곪기 일쑤지요. 한 상사는 훈련병의 상처에 생긴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국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가가 원하는 걸 만들어내는 사람들, 입만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육체를 던져가며 실행하는 사람들···이들로 인해 사는 게 아닐까. 국가가 요구하면 해적을 사살하고, 검은 바다에 뛰어들고, 철모 끈에 불이 붙어도 K-9 자주포를 쏴대는··· 그런 이들로 인해 국가는 사는 것 아닌가.

 한 준위마저 죽어 국민은 슬픔에 잠겼다. 해군은 초조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증거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뢰 파편만 건지면 되는데, 그것만 있으면 북한을 꼼짝 못하게 할 수 . 그런 해군에 공군이 말했다. 부산에 대평호가 있다고. 대평호는 동해와 서해에서 전투기 잔해를 건져 올린 ‘전과(戰果)’가 있었다.
 그러나 베테랑에게도 작업은 어려웠다. 바닥은 돌투성이고 조류도 빨랐다. 대평호는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다. 찢어지면 선원들이 새벽까지 고쳤다. 5월 15일 드디어 ‘발전기 같은 게’ 올라왔다. 어뢰 추진기였다.

 어뢰는 완전히 판을 바꿨다. 많은 나라 의회가 북한을 지목하고 규탄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상당수가 북한 소행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제1 야당 민주당이 대표적이었다.

 

 며칠 전 나는 김남식 선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전남 고흥 출신으로 민주당 지지자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민주당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어요. 어뢰로도 안 되면 도대체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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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번가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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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절' 선암사와 개심사에서 위로받다 

살아가야 하기에 아픈 이 4월에 꽃은 곁에 피어 忍苦를 들려준다
仙巖寺는 영산자 보랏빛 물들고 開心寺엔 연둣빛 진귀한 청벚과 마음에 난 모 깎는 승방 있구나
고달픔 달래주는 供養의 꽃인가

봄이 봄 같지 않다. 하늘이 우중충하게 낮다. 맑을 거라던 날에도 안개인지 연무인지 뿌옇기 일쑤다. 기온이 높고 대기가 오래 머무는 데다 비까지 드물어서라고 한다. 봄꽃도 작년보다 이르게는 보름 일찍 피었다. 한꺼번에 우르르 왔다 우르르 떠났다. 4월에 벌써 아득한 늦봄 냄새가 난다.

지난 주말 잔뜩 찌푸린 하늘보다 가슴이 더 답답했다. 아기 손처럼 여린 연둣빛 새잎들을 보고 싶었다. 순천 선암사를 떠올렸다. 이 1500년 백제(百濟) 절로 들어서는 숲길엔 유난히 많다. 지절대는 계곡을 왼쪽에 두고 순한 흙길을 걷는다. 키 큰 활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차 연록부터 진초록까지 갖은 녹색으로 병풍을 쳤다. 아무리 날이 흐려도 생명의 합창은 찬란하다. 눈이 시원하고 숨통이 터진다.

대웅전 마당으로 드는 만세루에 큼직한 편액 '육조고사(六朝古寺호란 때 지키던 강화성(城)이 떨어지자 남문에서 스물셋에 자진(自盡)했다. 여느 4월 같으면 초파일 행사를 예고했을 편액 아래 플래카드가 방문객에게 말을 건넨다. '모두 한마음으로 슬픔과 고통을 나눕시다.'

대웅전 옆 공양미 담아둔 학독에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날아왔다. 카메라를 겨눴더니 쌀 쪼아 먹으려다 말고 눈치를 본다. 꽁무니 돌려 달아날 채비부터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지 머뭇거린다. 왼쪽 돌계단을 올라서자 눈이 환해진다. 대웅전 뒤 키 3m나 되는 나무가 온통 진보라 꽃이다. 진달래 진 지가 언젠데 한다. 그 옆 400살 흰철쭉은 나이가 무색한 순백 꽃이 아이 손바닥만 하다.

무우전 돌담길로 올라선다. 거기 줄지어 선 늙은 매화 여남은 그루가 진작에 꽃 떨구고 새 잎 무성하다. 돌담길 초입 원통전 옆마당에도 영산자 두 그넘고 화사한 꽃들이 사방으로 뻗어 둥근 꽃 봉분 같다. 곁에 늘어선 겹벚도 소담스러운 진분홍 꽃이 흐드러졌다. 때아닌 꽃멀미가 난다. 원통전 뒤 칠전선원 앞엔 630살 선암매(梅)가 8m 거목으로 버티고 섰다. 회춘하듯 싱그러운 연두 잎으로

선암사는 '꽃 절'이다. 늦은 3월이나 이른 4월 매화로 시작해 5월까지 산수유 동백 벚꽃 영산자 영산홍 복사꽃이 피고 지며 꽃대궐을 이룬다. 여름에도 자줏빛 배롱꽃, 노란 모감주꽃, 하얀 치자꽃, 빨간 석류꽃이 이어지는 전통 조경의 보고(寶庫)다.

불가(佛家)에서 꽃은 고행의 세월을 견뎌 피기에 온갖 수행, 만행(萬行)을 상징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보살행(行)의 서원(誓願)이다. 그래서 초·향·차· 과일·쌀과 함께 부처에게 바치는 육법(六法) 공양에 든다. 선암사의 봄은 부처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꽃 공양으로 넘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산 상왕산 중턱 백제 고찰(古刹) 개심사에 들렀다. 아담한 절집을 꽃이 휘감은 또 하나 '꽃 절'이다. '洗心洞(세심동)' '開心寺(개심사)'라고 새긴 자연석 둘이 산문을 한다. 마음을 씻는 골짜기, 마음을 여는 절. 절묘한 대구(對句)다. 솔숲 지나 절에 다다르면 네모난 연못 경지(鏡池)가 객을 맞는다. 외나무다리 건너며 못 물을 거울삼아 마음 가다듬으라 이른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석축 위 범종각은 네 기둥이 휜 나무 그대로 지붕을 떠받쳤다. 춤추듯 굽은 기둥이 범종을 너그럽게 감싸 안았다. 축대 모퉁이엔 겹벚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먹만 한 하얀 꽃떨기를 늘어뜨렸다. 진분에 왔더니 그 사이 죽은 모양이다.

 

대웅전 왼쪽 승방 심검당도 범종각처럼 굽은 나무를 썼다. 기둥과 들보와 문턱이 단청 한 점 없이 말간 얼굴로 물결친다. 자연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한 집이다. 여염집 새하얀 겹벚꽃이 어우러졌다. 숲 속에 숨듯 들어선 해우소는 진짜 측간이다. '용무 본 뒤 곁에 쌓아둔 낙엽을 뿌려달라'고 쓰여 있다. 문짝도 없이 트인 변소 칸에 쭈그리고 앉아 앞뜰에 활짝 핀 분홍 겹벚꽃을 본다.

대웅전 오른쪽 명부전 마당 끝에도 겹벚 네댓 그루가 있다. 꽃 빛깔이 이상하다. 신비롭게도 푸르스름한 연둣던 진객(珍客)이 올봄엔 서둘러 왔다. 그 아래 서서 서늘한 기운을 쏘인다. 개심고 푸른 겹꽃들이 봄마다 마지막 벚꽃 잔치를 벌인다.

어느 시인이 화창한 봄날 한숨지었다. '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봄은 축멸이다. 살아 있다는 기쁨과 살아가야 한다는 아픔이 엇갈린다. 온 나라를 어둠에 가둔 이 4월이 잔인하다. 청신한 새잎과 아름다운 공양화(花)에 묻힌 두 절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 2014/04/24          -조선일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순천 조계산 선암사(2013.06)

​서산 상왕산 개심사(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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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은 마지막이야!            

      

꽃이 바람에 진다. 채 피기도 전에 여린 꽃잎들이 허공에 흩날린다. 봄꽃처럼 싱그러운 열일곱 살 안팎의 고등학생 등 백수십 명이 봄바람에 꽃잎 지듯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엘더라도 4월은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다. 독재에 항거하다 희생된 4·19의 영령들 때문만이 아니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명이 목숨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급하게 땅부터 파헤친 안전의식 결여가 원인이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아침의 진도 앞바470여 명을 태우고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물살 거센 맹골수도에서 좌초할 무렵, 25세의 신참 3등 항해사에게 조타실을 맡긴 대리 선장은 침실 안에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으로 승객들의 발이 객실에 묶여 있는 동안 선장과 기관사 등 선박직 선원들은 승객 몰래 전용 통로로 배를 빠져나와 맨 먼저 구조선에 올랐다.

 

 

 그렇게 살아나온 선장이 한가롭게 젖은 돈이나 말리고 앉아 있을 때, 스물두 살의 임시직 승무원 박지영씨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대피시키느라 동분서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언니는 왜 구명조끼 안 입어요?” 학생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선장도, 항해사도 헌신짝처럼 내던진 책임윤리·직업윤리·생명윤리가 아르바이트 여대생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그 절체절명의 재난 현장에경제대국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때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 어린 학생들은 가라앉는 배 안에서 조국의 손길을 애타 함께 바다에 잠겼다. 행정안전부의 간판을 굳이 안전행정부로 바꿔 달면서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외치던 이 정부 아닌가.
 간판을 바꾼다고 내실이 채워지내실이란 정신적으로는 책임의식의 확립, 실제적으로는 치밀한 안전관리 시스템과 체질화된 훈련이다. 그 치열한 던가. “다시는 불행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다.” 얼마나 많이 들어온 공염불인가. 몇 명 감옥 가고, 몇 명 물러나고, 결의대회 몇 번 하면 그만이었다. 책임지고 물러난다? 거짓말이다. 물러나는 것이 무슨 책임인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고 실종된 여섯 살배기 오빠,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숨진 고등학생, 첫 제자들을 살려내고 배와 함께 물에 잠긴 새내기 여교사, 기우의 희생과 헌신은 어둠 속 한줄기신은 얼마나 누추한가. 구조 현장의 지리멸렬한 지휘체계, 필수 인력과 장비의 늑장 투입, 재난 전문가가 배제된 재난대책본부의 관료주의…, 온 국민의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누가 ‘선진국의 문턱’ 운운하는가. 배 한 척 침몰해도 이렇듯 공황상태에 빠지는 터에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하면 어찌할 것인가. 안전관리가 엉망인 곳이 여객선 하나뿐일까. 우리 사회 각 부문의 책임의식이 혁명적으로 쇄신되지 않는 한 선진화의 길은 아득히 멀다. 재난 관련 방치한 채 오싸움에만 몰두해 온 정치권, 몸 사리기에 급급한 관료들에게 쇄신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지쳤다. 공직사회보다 역량이 뛰어난 민간에 기대할  무책임한 관료와 정치권도 마지못해 뒤따라오지 않겠는가.

 4월은 잔인한 달이지만 부활절의 계절이기도 하다. 다 피지 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바친 조화가 놓여 있었다. 유언 같은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총체적으로 무너진 대한민국의 생명윤리를, 우리 사회의 책임윤리와 직업윤리를 일깨우고 있다.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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